1979년 8월 뉴욕 공연 중 미국에 망명한 볼쇼이발레단 수석 남성무용수 알렉산드르 고두노프(왼쪽)와 망명 대신 소련으로 귀국을 택한 그의 부인 루드밀라 블라소바.
■1979년 8월28일 냉전시대의 사랑과 이별
영화 <백야>를 기억하십니까.
미국 국적의 여객기가 긴 백야를 통과하며 시베리아 상공을 날아가는 첫장면이 인상적인 영화죠.
이 비행기에는 서방세계로 망명한 소련(소비에트 연방) 출신의 세계적 발레리노 니콜라이가 타고 있는데요.
갑자기 비행기가 고장을 일으키면서, 그는 떠나온 조국으로 원치않는 귀국을 하게 됩니다.
1986년 개봉했던 이 영화에서 세계적 무용수 니콜라이 역을 맡은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는 실제 소련 출신입니다.
캐나다 순회 공연 중 망명한 그의 사연 덕분에, 영화 속에서 망명 후 고국에서 다시 탈출하는 부분까지 실화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91년 소련이 붕괴하기 전까지, 미국과 소련은 곳곳에서 갈등과 긴장을 불러일으키며 대립해 왔습니다.
실제 미사일을 쏘며 전쟁을 치르진 않아도, 첩보전, 군비경쟁, 우주개발 경쟁 등으로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졌죠.
그 시절 소련의 세계적 발레단 ‘볼쇼이’가 유럽과 미국 등지로 활발하게 순회 공연을 다닌 것은 일종의 문화력 과시 측면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이 과정에서 유명 무용수가 서방으로 망명을 하는 사건들이 이따금씩 벌어지곤 했습니다.
40년 전 오늘 경향신문에는 이런 사례 중 하나가 등장합니다.
뉴욕 공연 중이던 볼쇼이 발레단의 수석무용수가 미국으로 망명을 택했고, 함께 공연했던 그의 아내는 소련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인데요.
도대체 무슨 사연일까요?
1979년 8월28일자 경향신문
1979년 8월, 볼쇼이 발레단은 뉴욕 링컨센터에서 공연 중이었습니다.
그들이 공연을 마치던 날, 한 신문에는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와 나탈리아 마카로바, 루돌프 누레예프에 이어 또다른 무용수가 서방에 남기를 택할 것’이라는 기사가 실립니다.
그리고 실제로 볼쇼이 남성 수석무용수 알렉산드르 고두노프가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합니다.
“아내도 함께 정착하게 주선해달라”는 고두노프의 요청으로 미 국무성은 루드밀라 블라소바의 행적을 좇는데요. 그녀는 이미 소련 비밀경찰
KGB
로 추정되는 8명의 소련인과 함께 아에로플로트 항공기에 올라 이륙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미 당국은 급기야 경찰차 3대를
JFK
공항 활주로에 투입해 소련행 여객기의 이륙을 저지합니다.
이 사건은 미·소 간 외교전쟁으로 번집니다.
소련 당국과 언론은 “블라소바가 자유의사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 측은 “중립적인 장소에서 그녀의 자유의사를 확인해야만 이륙을 허가하겠다”고 맞섭니다.
블라소바는 이때 이민국 등 정상적인 출국 절차를 밟지 않고 여객기에 탑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소 대치 나흘째, 마침내 양국은 활주로에 마련한 이동휴게실에서 20분 간의 면담에 합의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블라소바는 “나는 남편을 사랑한다. 그러나 남편은 미국에 남겠다고 결정했고 나는 떠나기로 결정했다”며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까지 나서야 했던 양국 간의 줄다리기는 이렇게 소련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소련 측이 이 사건을 1986년 <222번 여객기>(
Flight
222)라는 이름의 영화로 만든 것도 자신들의 승리를 알리기 위함이었겠죠.
고두노프는 이후 “미 국무성을 통해 아내와의 면담을 희망했으나 소련 당국이 이를 거부했다”고 밝혔습니다.
일부 언론은 블라소바가
KGB
의 정보원이었다고 보도했지만, 1년여 뒤엔 그녀가 ‘서방에서 남편과 재결합하는 것을 허가해달라’고 고국에 요청했다는 내용도 알려졌죠.
둘은 결국 대사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이혼하게 되지만요.
서구의 자유로움을 동경했던 것으로 알려진 고두노프는 선배인 바리시니코프가 활약 중이던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에 잠시 몸담았다가 영화배우로 전향합니다.
영화 <다이하드>에서 독일인 테러리스트 역할을 맡는 등 활약하지만, 1985년 45세의 나이에 알콜중독과 각종 합병증으로 숨을 거둡니다.
지나친 자유가 독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모스크바로 돌아간 블라소바는 은퇴할 때까지 볼쇼이 발레단에 남았습니다.
이후엔 아이스 스케이팅 안무가로도 변신했죠.
고두노프보다 7살 연상인 블라소바는 고두노프가 볼쇼이 발레단에 입단하던 71년, 이미 수석 무용수였습니다.
고두노프와의 불꽃같은 만남으로 부유한 첫남편을 버리고 재혼을 택한 것도 같은 해였죠.
남편을 버릴 수는 있어도, 수석무용수 자리는 내려놓을 수 없었던 것일까요?
망명 거부 이후 동료 단원들의 입을 빌려 나온 “좋은 역할을 위해 관리들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비판을 보면, 그런 추측도 가능해 보입니다.
참 잘 어울렸던 두 사람의 사진을 보니 문득 궁금해집니다.
소련이 조금 더 일찍 무너졌다면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959643
얼마전 백야를 보다가 뜬금없이 생각났던 인물이 바로 다이하드의 알렉산더 고두노프 (Alexander Godunov)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와 상반되는 그의 인생이 안타깝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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